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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아프리카

[속보] 마다가스카르 대선 최종결과.jpg

by 아스트로패스 2023. 11. 27.

2023년 마다가스카르 대통령 선거 최종결과(투표율: 46.36%[-7.87])

 

안드리 라조엘리나(TGV, 중도좌파, 사민주의, 참여정부): 58.95%(+19.72)

시테니 랜드리아나솔로니아이코(PSD, 중도좌파, 사민주의): 14.40%(+14.40)

마르크 라발로마나나(TIM, 중도우파, 경제적 자유주의): 12.10%(-23.25)

헤리 라자오나리암피아니나(HVM, 마다가스카르의 새 힘): 5.18%(-3.64)

하조 안드리아나이나리벨로/롤랜드 라치라카 등 군소후보: 9.37%(-7.23)

 

안드리 라조엘리나 대통령 44.55%p차로 야권 보이콧 속 재선 확정

 

 

[요약] 2009년 마다가스카르는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의 대우로지스틱스 계약 논란과 비바TV 폐쇄 사건을 계기로 큰 정치적 혼란을 겪었습니다. 이때 안드리 라조엘리나가 대중의 지지를 얻으며 군부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에 올랐으나, 민주적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계속 제기되었습니다. 2023년 대선에선 흑역사를 뒤로하고 재선에 성공했으나, 야당의 보이콧과 여러 논란으로 인해 정치적 불안정성과 독재 비판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다가스카르의 민주주의와 정치적 안정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 남동해안 인근에 위치한 인구 2850만(1인당 GDP 500달러) 안팎의 거대한 섬나라로, 인도인들의 방문, 오만 제국 등의 아랍인 정착과 노예무역 발달, 해적들의 안식처,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경쟁 등의 역사를 거친 후 현지 통일 국가로 자리잡던 내륙 고지대 기반의 메리나 왕국을 프랑스가 꺾으며 최종적으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오랜 독립 투쟁과 가혹한 무력진압,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 독일의 유대인 추방계획 목적지 검토 등의 다사다난한 역사를 거친 후 연합군에 해방된 마다가스카르였지만, 쇠약해진 프랑스가 2차 대전 이후 벌어진 식민지 연쇄 봉기 진압 비용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며 1960년 아프리카 독립의 해에 동참하여 독립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독립한 마다가스카르는 교사 출신의 온건 자치파이자 1946-47년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이 비주류 해안-주류 내륙 갈등으로 번지며 파국을 일으킬 거라며 반대한 독립 신중론자인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프랑스 노동자 인터내셔널(현 프랑스 사회당 전신) 국회의원이 마다가스카르 권리 존중/무장봉기자 석방을 지속적으로 외친 끝에 국내외의 신망을 얻은 나머지, 1958년 자치공화국 총리에 이어서 초대 대통령 자리에 취임했습니다.

 

대통령 직에 오른 치라나나는 친서방 반공 사회민주주의 체제[말라가시 사회주의] 하의 지속성장[5개년 계획, 반-국유화 노선에도 협동조합을 통한 국가개입]과 교육 강화, 인권 및 다원적 민주주의보장을 통한 지역갈등 해소 및 국민행복도 증진, 장기적인 탈프랑스 이익추구(미국, 서독, 대만, 남부 아프리카, 심지어는 공산권과의 경제협력 시도), 반-범아프리카주의 현실외교에 나섰습니다.

 

물론 61년 사회민주당에 의한 지방의회 해산-재선거를 통해 여러 야당 도시들이 넘어가고 야당 수십개가 인수합병 되어 압도적 제1당 사회민주당과 한쪽 끝에 고립된 마다가스카르 독립을 위한 의회정당(AKFM, 내륙 중심, 공산주의)의 원내 1.5당제화(남부 빈민 기반의 원외정당 마다가스카르를 위한 마다가스카르/마다가스카르 독립을 위한 민족 운동[MONIMA, 민족주의/마오이스트 분파]도 존재)로 퇴행했다는 비판과 중심지 밖에서의 부정선거 논란이 잔존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서구식 선진정치를 지향하는 치라나나의 일당제/인권 탄압에 대한 강한 혐오와 47년 무장봉기자들에 대한 정치적 포용(3명의 투사 중 조셉 라보아항기 보건부장관, 자크 라베마난자라 경제장관 임명, 조셉 라세타AFKM 합류하며 거부) 속에 노동조합과 종교단체, 학생 및 여성단체들의 활동, 언론과 사법부의 독립이 폭넓게 자리 잡으면서 원외정치에선 나름대로 민주적 분위기를 형성하였습니다.

 

1965년 치러진 마다가스카르 대선 및 총선에서도 이로 인한 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치라나나가 선거자금이 부족해 전국 유세를 못한 야당연합 후보무소속 후보 모두를 97% 득표로 압도했으며, 여당 사회민주당(PSD)은 95%를 득표했습니다.  

 

하지만 CFA 프랑 등으로 지금까지도 서아프리카 경제를 꽁꽁 묶어 두는 프랑스가 명목상의 통치권을 반납했다고 영향력을 포기 할리는 만무했기에 경제적 종속(수만명의 프랑스인 기술관료 잔존, 수출입 회사 프랑스 소유, 제조업은 남아시아인 장악)이 계속된 나머지, 반식민주의로 프랑스 공산당과 연결된 독립 강경파 출신이자 사실상 유일 원내 야당이 된 AKFM로부터 이어지는 마다가스카르 시민들의 반프랑스 감정이 내륙에 위치한 수도 안타나나리보에서부터 쌓였습니다.

 

게다가 1960년대까진 낮은 부채 속에 인플레이션 비율을 뛰어넘는 성과를 얻는 온건 사회주의 노선에 대한 좌익 야권의 묵인 속에서 정책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인구폭발로 인한 부양인구 증가 속에 명목지표 상으로도 경제성장이 둔화된 데다, 대통령은 잦은 지병 악화로 인한 치료 외유가 촉발시킨 정치현실과의 괴리 속에 점점 권위주의자가 되어가면서 소속된 사회민주당 내에서 나오는 불만마저 묵살하였습니다.

 

그렇게 된 나머지, 기민주의 온건파의 수장 자크 라베마난자라 경제장관(제2부통령: 71.2-72.5)을 후계투쟁 끝에 축출시킨 진보파의 수장 앙드레 레삼파 내무장관과 같은 작은 독재자들의 출현과 치료 외유 시 합법적 대행자인 캘빈 치보 부통령(60.6-70.10, 71.2-72.10)과의 권력투쟁, 그로 인한 부패악화를 방기하면서 종국에는 71년 6월 국무회의를 통해 레삼파 전 내무장관(59.5-71.2) 겸 제1부통령(70.10-71.2)을 숙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내외에서도 현실을 모르는 독선적 친프랑스주의자라는 비판이 끌어올랐습니다.

 

1970년 9월 6일에 치러진 총선과 1972년 1월 30일 치러진 대선은 말라가시 사회주의 체제의 제한된 선거민주주의에 대한 의혹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사회민주당의 93% 득표에 대해 야당이 제출한 수백 건에 달하는 부정선거 의혹 진정서에도 불구하고 인용된 것은 하나도 없었으며, 치라나나 본인의 98.8% 투표, 99.72% 득표는 언론 탄압과 출간 불허, 유권자 압박 속에서 벌어진 사실상 부정선거 아니냐며 메리나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반발을 초래했습니다.

 

그 사이 북부와 서부 해안 중심 2차 산업 위주의 경제개발계획에서 소외되고 부패 관료들에게 무거운 세금과 부가요금으로 착취당한 남부 농민들과 남부 해안도시 톨리아라 시장직에서 축출당한 MONINA 지도자 몬자 자오나를 중심으로 레삼파 제1부통령의 은밀한 격려(반란죄로 체포하려는 사회민주당의 함정) 속에 1971년 4월 벌어진 대규모 비폭력적 정부기관 점거 사태는 치라나나의 온건한 진정 노력(부패한 관료들 맹비난)에도 불구하고 헌병사령관 리처드 라치만드라바 대령에 의해 유혈사태(공식 사망: 수십, 비공식: 수천)와 MONIMA 해산으로 이어지며 사회민주당 정부에 대한 적개심을 촉발시키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1972년 3월엔 각종 개혁요구(신식민주의 노선/정치탄압 철회)를 거부당한 수도 베펠라타나나 의대를 중심으로 AKFM 지지선언(전국 대학생 80%가 동의)이 잇따르면서,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대통령의 대학의 정치화에 대한 맹비난과 신임 내무장관 바르텔레미 조하시에 의한 언론 검열 강화와 의대 학생회 해산과 같은 극약처방에도 불구하고 로타카란 이름 속에 수도의 모든 대학과 고등학교로 시위가 번져갔습니다.

 

주동자 수백명을 체포해서 섬에 처박아 뒀음에도 소도시에서만 수천명의 시위대에 압도당한 수십명의 공화국 보안군들은 무차별 발포를 시도했으나 오히려 분노한 시민들의 전면 파업을 맞닥뜨리게 되었고, 이들이 시위 주동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공화국 보안군에 의해 충돌이 벌어지면서 또다시 수십명이 사망했습니다. 한편, 진압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헌병대는 명백히 거부하였고, 군대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치라나나는 상황의 악화를 마침내 인식하고 섬에 갇힌 주동자들을 풀어줄 것을 명령하며 타협책을 모색했으나, 섬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이 무력개입에 나서지 않겠다고 하면서 권위를 완전히 상실하며 1972년 5월 프랑스의 지지를 받은 내륙 출신 가브리엘 라마난초아 국방장관을 총리로 임명하면서 전권을 부여하며 군부에게 정권을 사실상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이를 임시조치로 인식한 치라나나는 명목상의 대통령직을 무기로 계속해서 실권을 되찾으려 애썼으나, 전국 여행 중에 항의 시위를 하는 시민들과 동상 철거를 보고 1972년 10월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대통령 임기 중단/총리에게 대통령직과 함께 5년간 전권 부여 찬성이 96.43%에 달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쓸쓸히 퇴임하게 됐습니다.

 

73년 10월 21일 치러진 국가인민개발위원회 자문 선거(총선 대체)는 역으로 사회민주당이 부정선거의 희생양이 되면서 친군부 인사들130/144으로 의회를 완전히 장악하게 됐으며, 라마난초아의 제2공화국은 사회주의 지향을 표방하며 공산 동구권 및 아프리카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농장의 국유화를 선언하며 야심찬 좌향좌 노선을 걸어나갔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반정부 투사가 된 치라나나레삼파와 화해하며 마다가스카르 사회당을 합병 창당하였습니다. 한편, 라마난초아 역시 CFA 프랑 탈퇴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부반발과 권력 투쟁, 인종 및 사회 갈등을 통제하는데 실패하고 아내가 연루된 부패스캔들 끝에 1975년 2월 5일 사임하고 말았습니다.

 

직후 권력을 차지한 것은 내륙 출신의 리차드 라치만드라바 내무장관이었으나, 제3대 대통령 취임 고작 6일 만에 공화국 보안군이 연루된 의문의 암살을 당하며 암살 연루 의혹을 받은 치라나나, 레삼파 등에게 구속수사를 당하는 곤욕을 치르는 결과만을 남겼습니다.

 

그 다음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육군 장성 출신의 질레스 안드리아마하조였으나, 공화국 보안군과 극좌파를 제외한 거국군부 결성과 함께 군부 지지자치라나나 지지자 간의 충돌문제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는 극단적 조치의 최종 수혜자는 해군장교/외교무관 출신 디디예 라치라카 외무장관이 되었습니다.

 

디디예 라치라카는 1975년 6월 대통령 자리에 등극하고 급변사태 최대 수혜자로 자리매김하면서 그 역시 암살 배후로 의심받았습니다. 그와 별개로 라치라카는 공산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한 나머지 1975년 12월 국민투표를 통해 7년 연임제와 함께 신헌법을 도입해서 국명을 마다가스카르 민주공화국으로 변경하고 마다가스카르 혁명당(AKFM 합류)을 제외한 모든 정당들을 사실상 금지(모든 정치인은 혁명당 소속)한 후 마다가스카르식 교육을 주창하여 제2공화국 2기를 열었으며, 당시만 해도 잘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독특한 토착 공산주의 사상으로 보였던 주체사상 등의 사상체계들에 관심을 보이며 조선로동당 등과 협업했습니다.

 

하지만 공공부채가 폭발하고 1980년 코카콜라 파동(마다가스카르산 바닐라 사용 감소 때문에 1인당 GDP 581달러로 역사상 최고치 찍던 시점에서 치명적인 경제적 타격) 등으로 경제사정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취임 후 몇 년 만에 사회주의 지향 노선을 포기하고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으며 경제자유구역 지정, 국영기업 대거 민영화를 위시한 자본주의 경제개혁에 착수하였습니다.

 

한편, 82년 대선엔 80% 득표를 얻으며 20% 득표를 얻은 몬자 자오나를 압도했지만, 89년 대선에선 반-치라나나 사회주의자이자 MONIMA->혁명당원이었던 마난다피 라코토니리나, 제롬 마로자마 라자나바히니, 몬자 자오나 등을 62.71%:19.33%:14.93%:3.03%로 석연치 않게 꺾은 나머지 부정선거 논란이 터지며 78년 좌익 학생 반란에 이어서 대규모 항의 시위가 발생했으나 수십명이 사망하는 폭력 진압 속에 묵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산 동구권의 붕괴로 인한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의 물결은 아프리카, 그 중에서도 마다가스카르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래전부터 경제적 우향우를 계속해온 라치라카 정부였지만 더 이상 은근한 선거 통제조차 불가능해지게 됐으며, 극심한 불경기와 권위주의 독재에 민주화를 갈망하던 시민들이 91년 대통령 궁으로 수십만 규모의 행진을 벌이면서 마침내 야당지도자 앨버트 자피 주도로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제3공화국 이전을 통한 다당제 자유주의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임시정부 수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통령직을 차지하던 라치라카는 권력 유지의 희망을 놓지 못하고 92-93년 대선에 출마했으나, 1차부터 자피에게 46%:29%로 참패한데다, 2차 투표에선 아예 더블 스코어(66.7%:33.3%)로 압살당하며 축출되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자피 정부에도 해피엔딩만 계속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경제 악화는 계속되는 와중에 95년 국민투표 통과로 총리 임명권 확보 등 자피 대통령의 권한이 크게 증가하였지만, 부패와 권력 남용 논란이 터지면서 96년 탄핵당하는 신세에 처하였습니다.

 

한편, 실권 이후 온건 좌파 생태 인본주의 노선으로 전향한 마다가스카르 혁명당과 라치라카는 안정된 장기집권 시절에 대한 사람들의 향수를 등에 업고 수십만에 달하는 탄탄한 당원 기반으로 재기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렇게 치러진 96년 대선 결과, 1차 투표에선 4년 전과 달리 라치라카자피36.6%:23.4%로 압도했으며, 라치라카 정부 출신 3위 후보 헤리조 라자피마할레오(15.1%)의 라치라카 결선 지지선언에 맞서서 4위이자 대통령 권한 대행이던 노베르트 라치라호나나(10.14%)가 자피를 지지선언했지만, 결선 결과 1.42%p라는 간발의 차(50.71%:49.29%)로 라치라카의 귀환이 이루어졌으며 헤리조는 부총리 겸 외무장관 직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집권한 라치라카의 통치하에 경제가 회복세(연 5% 경제성장률)로 돌아서고 권력분립과 지방자치가 자리잡는 듯했으나, 2002년을 전후하여 아시아의 IMF 사태와 닷컴 버블이 터진 영향이 마다가스카르까지 들이 닥치면서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당장 경제성장률의 악화가 심각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10%대 물가 상승률진입과 최대 20%대 후반 도달 사태라치라카 정부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었으며, 2001년 대선에선 재검표까지 간 후 2002년 쌍방 계엄 선포의 폭력사태 끝에 미국, 프랑스, 노르웨이의 공인 속에 성공한 기업 CEO이자 안타나나리보 시장 출신의 마르크 라발로마나나노베르트 라치라호나나의 지지 속에 대통령직에 당선되었으며 이에 불복한 라치라카는 최후의 쿠데타 시도 실패 후 아예 프랑스로 망명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1차 발표는 라발로마나나 46.44% 라치라카 40.61% 앨버트 자피 5.34%, 헤리조 라자피마할레오 4.27%였지만, 2차 발표에선 라발로마나나 51.46% 라치라카 35.90% 앨버트 자피 5.11% 헤리조 라자피마할레오 4.00%로 라발로마나나의 결선 없는 당선이 확정된 것입니다.

 

하지만 라발로마나나가 당선되자마자 마다가르카르는 정치갈등의 후폭풍으로 곧장 경제위기가 폭발하며 경제성장률 -12.7% 등극과 함께 1년 사이 30% 인플레와 -8% 디플레를 오가며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MF 집중 지원 속에 2003년부터 경제성장률은 10%에 육박하며 5%를 넘나드는 고도 성장으로 전환된 데다, 2006년부턴 물가상승률 역시 10% 안팎에 머무르며 나름 관리되는 수준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치러진 2006년 대선에서도 국회의장 출신이나 이란 핵프로그램 옹호 논란으로 축출된 진 라히니리코 무소속 후보라치라카 전 대통령의 조카 롤랜드 라치라카 무소속 후보, 헤리조 라자피마할레오 전 부총리, 노베르트 라치라호나나 전 대통령 권한대행 등을 라발로마나나(TIM, 나는 마다가스카르를 사랑해)가 야권의 부정선거 주장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압도적인 1차 투표 스코어(마크 라발로마나나 54.8%, 진 라히니리코 11.7%, 롤랜드 라치라카 10.1%, 헤리조 라자피마할레오 9.0%, 노베르트 라치라호나나 4.2%)로 꺾으며 그의 초장기집권이 현실화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라발로마나나의 경제성장 역시 여전히 심각한 물가 상승률과 지나친 메리나 내륙 중앙집권, 부정부패와 지역차별, 정경유착을 통한 불공정한 민영화, 빈부격차 악화로 인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마찬가지라는 앨버트 자피를 위시한 야권 정치인들의 비판이 터져나왔습니다.

 

이런 와중에 수도 라디오의 음악 DJ 안드리 라조엘리나(1974년생)가 거친 입담과 신랄한 정부 비판으로 프랑스 고속철도처럼 시원시원하다며 TGV라는 별명 속에 인기를 얻었으며, 2007년엔 노베르트 라치라호나나로부터 TV 및 라디오 채널을 인수하여 비바 TV로 변경하여 반정부 투쟁의 최선봉에 서고 33세의 나이로 수도 안타나나리보 시장선거에 TGV란 약칭의 단호한 말라가시 청년들이란 당을 만들며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라발로마나나의 최대 대항마로 부상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터진 2009년 마다가스카르 쿠데타는 2008년 라발로마나나가 한국의 대우로지스틱스에 국가 경작지 크기의 절반에 달하는 땅을 독단적으로 판매했다는 논란이 불거지고, 08년 12월 프랑스로 망명한 라치라카를 인터뷰한 비바TV가 같이 보도한 곳은 여럿인데도 불구하고 혼자만 강제 폐쇄당하면서 촉발됐습니다.

 

비록 대우가 차지한 지역 상당부분이 사바나 기반의 미개발지로 농지개발 및 인프라 건설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서 일각의 주장처럼 공짜 이권을 통째로 먹는 식은 아닌 편이었지만, 당장 한국 입장에서 봐도 이는 일본제국의 대한제국 황무지 개간권 요구(한반도의 10%)를 통한 인프라 건설 후 이권 침투등을 연상시키기에 대우의 신식민주의 플랜테이션 건설 의도 얘기에 회의적인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좋지 못한 시선을 받았습니다.

 

더군다나 대우 측에서 동아시아 가축사료용 작물 재배라는 본래 목적과 별개로 사업 추진 정당화를 위해 한국 식량안보문제를 거론하는 등 여러 실언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 등에서 이를 한국 기업의 신식민주의 행태로 보도하자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라조엘리나 주도의 총파업 시위에 이어서 09년 2월 대통령궁 항의 시위와 유혈진압(수백명 사망), 지쳐버린 국방장관의 사임으로 폭발하였습니다.

 

마침내 09년 3월엔 육군 중심의 친-라조엘리나 군사 반란이 터지면서 대통령궁과 주요 정부기관이 모조리 장악당하고 의회 상하원이 해산당했으며,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당혹감과 반발, 그리고 해군 중심의 반-라조엘리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궁지에 몰린 라발로마나나는 망명 후 책임 총리 임명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겠다며 2001년 우군이었으나 2006년엔 대선 경쟁자(소수점 이하 득표)가 된 마난다피 라코토니리나를 09년 4월 전화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3월 중순부터 과도정부수장 겸 대통령을 자처하던 라조엘리나와 06년 대선 출마 불허인사 몬자 로인데포 총리, 시민과 군부는 라발로마나나의 잔재를 인정할 수 없다며 총리가 임명된 지 한달도 되지 않아 군대에 체포당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그렇게 라조엘리나는 군부의 지지를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되면서 전세계 최연소 국가 지도자 중 하나로 이목을 끌게 됐습니다. 라조엘리나 대통령은 대우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정치위기 중에 벌어진 환경파괴와 경기 악화(09년 경제성장률 -4%) 대응에 나섰으며, 몬자 로인데포 총리의 쿠데타 해명과 빵, 식용유, 쌀 등 생필품가격 인하를 통해 사태 수습에 힘썼습니다.

 

하지만 쿠데타로 집권한 만큼 민주적 정당성과 정국 장악력이 굉장히 떨어졌으며 5% 안팎 안정화에 성공한 물가 상승률에 비해 경제성장은 기대치(0.3%, 1.5%, 3.0%, 2.4%라발로마나나 시절 실질 최저치인 4.6% 초과마저 단 한번도 성공 X)를 밑돌아서 부담이 커졌기 때문인지, 지리한 갈등 끝에 2013년 치러지게 된 대선에선 측근 헤리 라자오나리암피아니나 재무장관을 후보 자리에 앉혀놓고 본인은 불출마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치러진 2013년 대선에선 대타 후보가 15.93%로 10.51%를 득표한 하조 안드리아나이나리벨로(1차 라조엘리나 정부 부총리 출신)와 9%를 득표한 롤랜드 라치라카를 제친 후 라발로마나나 정부 보건장관 출신의 1위 득표자(21.10%) 진 루이스 로빈슨(하조 지지선언)과 결선에서 맞붙은 끝에 53.49%:46.51%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고 같이 치러진 총선에서도 제1당 자리에 올랐으나, 정작 대선 이후론 대통령이 된 측근과 갈등이 계속되고 파국에 이른 끝에 2015년 종교적 행태로 세속주의 헌법 위반/부패 논란으로 야당과 힘을 합쳐 그를 탄핵 위기에 몰았으나 헌재에서 기각당했습니다.

 

그러나 물가 상승률 10%대 재돌파와 같은 인기 저하 요인으로 궁지에 몰린 헤리 라자오나리암피아니나가 재출마라는 결단을 내리며 치러진 18년 대선엔 라조엘리나 본인이 직접 출마하기로 결정, 쿠데타로 쫓겨났던 라발로마나나와도 맞붙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8년 11월 7일 치러진 마다가스카르 대통령 선거에서 라자오나리암피아니나는 8.82%로 소수점대 득표를 얻은 디디예/롤랜드 라치라카와 함께 일찌감치 탈락했으며, 39.23%를 얻은 라조엘리나 전 대통령과 35.35%를 얻은 라발로마나나 전 대통령이 결선에서 맞붙은 끝에 라조엘리나11%p로 여유롭게 승리(55.66% Vs 44.34%)하고 라발로마나나의 승복선언까지 받으면서 2차 라조엘리나 정부는 민주적 합법성까지 얻게 되었으며, 19년에 치러질 총선에서도 라조엘리나 측이 선전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실제로 2019년 5월 27일 치러진 총선에서도 상원의원 폐지를 내세운 라조엘리나의 여당 TGV2위 TIM25%p로 웃돌며 의회 과반을 장악하는 초압승(84/151)을 거두었으나, 상원 폐지엔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감축안(63->18)으로 돌아선 후 2020년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상황이 꼬이게 됐습니다.

 

라조엘리나 대통령의 전통 치료법에 대한 집착은 그의 국제적 평판을 더욱 떨어뜨렸으며, 코로나 초기 대응 경고를 묵살하여 대응이 엉망이 된 끝에 경제성장률은 -7.1%로 떨어졌습니다. (이후 5.7%, 4.2%로 회복)

 

그럼에도 20년 12월 치러진 지역기반 상원선거에선 야당의 보이콧 속에 이 와중에 라조엘리나 대통령은 전염병 관리 실패를 비난하는 언론사를 반정부 가짜뉴스로 구금하는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21년 7월엔 암살 미수 위기까지 겪게 됐습니다.

 

게다가 21-22년엔 대규모 기근 대응 실패까지 터지면서 기후변화와 인재 중에서 어느 쪽 책임이 더 크냐는 논란마저 불거졌으며, 이 상황에 영화 마다가스카르처럼 아프리카 본토의 동물들을 수입하여 호텔 동물원 및 일부 보호구역 생태계를 역동적으로 만들어 관광을 활성화시키자는 라조엘리나의 제안은 생물다양성 전문가들에게서 맹비난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결정타로 22년 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대규모 인플레이션이 코로나 후유증으로 골골대던 전세계를 강타함에 따라 기껏 안정된 물가 상승률이 또다시 10%대에 올라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경제성장 연착륙에 성공한 라조엘리나의 인기는 여전히 식지 않았으며, 23년 연말 들어 인플레 역시 급속도로 둔화되면서 재선 출마를 위한 기반이 굳건해졌습니다.

 

한편, 헌법 대로 재선 출마를 위해 대선 2개월 전 사임하고 상원의장이 선거를 관리하게 되었지만 23년 4월부터 이어진 야외 정치 집회 금지 결정은 국내외의 비판 속에 공정선거에 대한 의구심을 촉발했습니다.

 

그리고 선거 막판에 선거진행 자금 부족 사태와 프랑스 이중국적자 논란이 터지고 부패혐의로 비서실장이 체포당함에 따라 헌재의 라조엘리나 출마 승인에 대한 대부분의 야당 후보들(마르크 라발로마나나 전 대통령, 헤리 라아조나리암피아니나 전 대통령, 2차 라조엘리나 정부 국토부장관 재임한 하조 안드리아나이나리벨로, 롤랜드 라치라카)의 대대적인 반발이 터지면서 보이콧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년 11월 16일 선거를 강행한 라조엘리나는 그 나물에 그 밥인 야권 인사들(올드보이들의 놀이터)에 대한 국민적 실망감과 아직까진 신선한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 잔존으로 인해, 26일 발표된 최종 개표결과에서 생각보다 미미한 투표율 하락(54.23%->46.36%) 속에 정당성에 큰 타격을 입지 않은 채 2위(보이콧 불참한 친-푸틴 성향의 국제유도협회 부회장 겸 하원의원 시테니 랜드리아나솔로니아이코 사회민주당 연합후보)와 44.55%p라는 압도적인 격차로 승리(또다른 보이콧 불참자는 0.81%로 9위한 센드리슨 다니엘라 라데라니리나)하며 2025년 예정된 총선에선 지난 총선 이상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됐습니다.

 

다만 계속되는 야당의 보이콧과 시테니의 부정선거 주장은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마다가스카르의 대내외 민주 정당성 확보에 악영향을 주게 될 것이 뻔한 만큼, 방글라데시(14년 야권의 보이콧과 18년 정국 완전 장악한 여당의 부정선거 논란)처럼 해당 사태 장기화 방지에 실패할 경우 라조엘리나 정부의 또다른 불안 요소와 독재 비판 논란 요인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출처 목록 링크

http://www.hcc.gov.mg/?cat=6

https://www.ceni-madagascar.mg/

https://twitter.com/zimlive/status/1728623616055558261

https://presidentielle.ceni-madagascar.mg/bvrnat/bvrnate

https://ko.tradingeconomics.com/madagascar/inflation-cpi

https://twitter.com/FEscrutinio/status/1724898770557792485

https://twitter.com/worldlighter/status/1728442654281683424

https://ko.tradingeconomics.com/madagascar/gdp-growth-annual

https://scontent-cdg4-3.xx.fbcdn.net/v/t39.30808-6/405751756_650962257240704_3270794770080219278_n.jpg?_nc_cat=1&ccb=1-7&_nc_sid=5f2048&_nc_ohc=IKEo6461lp0AX9yaYHd&_nc_ht=scontent-cdg4-3.xx&oh=00_AfA-4q5VklQjmtt9QKUMlmSxJakI3NOXS4vVNnR3EW0n2Q&oe=656676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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